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레스덴 폭격 (문단 편집) == 여담 == [[발터 모델]] 원수와 그의 가족들이 폭격으로 폐허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했던 모델이 2월 13일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히틀러에게 행방불명된 자신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허가를 구했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자신의 부관이었던 테오도르 필링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급파시켜 행방불명된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한 후,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드레스드너 SC]]의 레전드 선수이자 나중에 감독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끄는 [[헬무트 쇤]]과 그의 가족들도 폭격에서 생존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otothek_df_ps_0000348_Ruine_der_Frauenkirche_gegen_Rathausturm.jpg|width=100%]] || [[파일:프라우엔키르헤.jpg|width=100%]] || || 패전 직후 || 현재 || 도심 한가운데의 '성모성당'([[프라우엔키르헤]])은 폭격 마지막 날 무너져 내리면서 개박살이 났다. 종전 뒤 공산정부는 이 폐허를 허물고 [[주차장]]을 건설해 종교적인 상징을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대로 철회되었으며 기어이 [[1989년]]에 동독 붕괴의 신호탄이 된 시위가 [[라이프치히]]에 이어 성모성당 앞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성당은 동독 치하에서 복구되지 않았다가 파괴 60년 만인 [[2005년]]에 잔해 하나하나까지 살려 꼼꼼히 복구되었다. 폭격 직후 언젠가는 성당이 복구될 것임을 믿고 있었던 드레스덴 시민들이 잔해들을 번호까지 매기면서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독일 재통일]] 이후 시에 기부하면서 복구에 도움을 주었다. 복구된 성당을 보면 검은 벽돌과 하얀 벽돌이 뒤섞여 있는데 검은 벽돌은 타 버려 검게 그을린 벽돌이고, 하얀 벽돌은 새로 쌓은 벽돌이다. 또 붕괴 이전의 프라우엔키르헤를 기억하던 노인들과 프라우엔키르헤를 찍은 기념 사진들 등 정말 막대한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기적과도 같은 거의 완전한 복원이 이뤄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영국에 대한 드레스덴 시민들의 감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냉전]] 종식 및 [[독일 재통일]] 직후였던 [[1992년]] 드레스덴에 방문했다가 계란 세례를 받는 일까지 있었고, 1992년에 영국에서 [[아서 해리스]]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 독일에서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에 영국에서 화해의 움직임으로 드레스덴 트러스트가 설립되어 600만 파운드를 모금하여 드레스덴 재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상징적인 것은 독일 공군의 [[코번트리]] 폭격으로 파괴된 코번트리 대성당의 잔해에서 가져온 중세의 못으로 만든 십자가가 드레스덴 공습에 참여했던 공군 파일럿의 아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양국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충칭 대공습]]과 더불어 동시기 태평양 전선에 있었던 미 육군항공대의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장군이 기획한 것이 바로 도쿄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던 [[도쿄 대공습]]이다. 한편으로는 [[아서 해리스]] 개인에게도 이 작전은 악재 아닌 악재로 작용했다. 물론 원수 진급에 작위까지 받는 등 커리어는 성공적이었지만 똑같이 대도시에 대한 전략·전술 폭격을 애용했는데도 훗날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받는 [[커티스 르메이]]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미국 밀리터리나 군사학 서적 등에서는 유능한 공군 지휘관으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소이탄을 광적으로 사랑한(...) 공군 장군 또는 붉은 남작의 사촌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독일 공군 장군들보다는 에이스들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고 장군들은 괴링, 갈란트, 케셀링 정도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전차 에이스보다 장군들이 주목받는 독일 육군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과 달리 자국 장성들에게도 냉소 어린 비판을 받을 정도로 유독 아서 해리스의 명망이 심하게 추락해 버린 것이다. 사실 이는 괴벨스의 가짜 뉴스의 지분이 크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좀 더 복잡한 문제다. 셋 중 르메이는 무차별 폭격의 대상이 당시 미국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던 일본이었던 관계로(왜 그랬는지는 [[진주만 공습]] 항목을 참조하자) 별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으며, 리히트호펜은 무차별 폭격의 주체가 소련이었던 관계로 전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연합군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무차별 폭격 행위가 묻혔다. 피카소가 그린 것으로 유명한 스페인 내전 당시의 게르니카 폭격도 있긴 했지만 여기도 당시 피해국이었던 스페인에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즘 정권이 들어섰던 탓에 미국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관계로 많이 묻혔다. 런던 폭격을 얻어맞은 영국인 아서 해리스에겐 억울할 따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